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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전 종식’ 고르바초프 전 소련 대통령, 투병 끝에 별세

소련 해체·동구권 민주화 이끌어…한국과 관계개선하기도

작성일 : 2022-08-31 17:33 작성자 : 김수희 (battie009@nate.com)

2009년 10월 31일 고르바초프 전 대통령이 독일 베를린에서 열린 기념행사에 참석하는 모습. [베를린 AFP=연합뉴스]


냉전 종식의 주역이자 옛 소비에트 연방(소련)의 마지막 대통령인 미하일 고르바초프 전 소련 대통령이 오랜 투병 끝에 향년 91세의 일기로 30일(현지시간) 별세했다.

1931년 러시아 스타브로폴에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난 고르바초프 전 대통령은 직접 콤바인을 몰며 농사일을 하는 등 힘든 청소년기를 보냈으나, 19세에 모스크바 국립대 법대를 졸업했다. 21세부터 공산당에서 활동하며 출세의 기반을 다졌던 그는 공산당 조직에서 승승장구하며 1985년 54세의 나이로 소련 공산당 서기장에 선출돼 권력의 정점을 차지했다.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서방과 소련을 주축으로 모인 동구권은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부터 40년간 냉전을 벌이며 체제 경쟁을 벌였다. 그러나 고르바초프 전 대통령이 개방개혁 정책을 펼치면서 사회주의 세력이 분열돼 냉전이 끝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그는 6년 동안 ‘페레스트로이카’(개혁)와 ‘글라스노스트’(개방) 정책을 펼치며 소련의 사회주의 체계를 뒤엎었으며 국제사회의 판도를 뒤바꿨다. 집권 첫해부터 스위스 제네바에서 로널드 레이건 전 미국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가진 그는 중거리핵전력조약(INF)를 체결하고 아프가니스탄에 주둔하던 군대를 철수하는 등 군비 감축에 나섰다.

1989년 동유럽 공산주의권에서 민주화 시위가 이어질 당시 이들 국가에 대한 무력 개입을 정당화하는 브레즈네프 독트린을 폐기해 자유를 허용했다. 그해 11월 9일에는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동서독 통일을 사실상 용인했다. 특히 같은 해 12월에는 몰타에서 조지 H.W. 부시 당시 미국 대통령과 만나 반세기 가깝게 이어진 냉전의 종식을 공식적으로 선언했다.

이듬해 두 정상은 미국 워싱턴DC에서 다시 만나 장거리 핵미사일과 화학무기 등을 감축하는 데 합의했다.

고르바초프 전 대통령은 노태우 전 대통령이 추진한 북방정책에 호응해 1990년 6월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소련 정상으로서는 최초로 한국 정상과 만났고, 그해 9월 한국과 수교를 단행했다. 노 전 대통령과 고르바초프 전 대통령은 이후에도 상대국을 방문해 경제 개발과 북한 문제 등을 논의했다.

고르바초프 전 대통령은 서방에서 냉전 해체의 주역이자 평화 구축, 동구권 민주화에 기여한 인물로 높은 평가를 받아 1990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고르바초프 전 대통령은 독일 통일, 동구권 민주화, 냉전 종식 등 역사에 한 획을 그은 탁월한 인물로, 1990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그러나 급진적인 개혁으로 소련 해체의 주역이 돼 소련을 시절을 그리워하는 러시아 일각에서는 ‘배신자’라는 오명을 뒤집어 쓰기도 했다.

고르바초프는 소련 초대 대통령에 선출됐지만 1990년 여름 급진적 경제개혁안인 ‘샤탈린의 5백일 개혁안’을 거부해 개혁파 인사들의 반발을 샀으며, 1991년 8월 여름휴가 도중 보수파의 쿠데타로 연금을 당하는 처지가 됐다. 쿠데타는 실패했으나 고르바초프 전 대통령과 소련 지도부의 권위는 크게 실추됐다.

고르바초프 전 대통령은 경기 침체에 체르노빌 사태가 겹친 상황에 섣부르게 시장경제를 도입했으나 그 결과는 인플레이션과 마이너스 성장이었다. 급진적인 개혁을 펼치면서도 사회주의에 대한 마지막 미련을 놓지 못한 그는 개혁의 속도를 조절하려 했으나 끝내 몰락했다.

소련의 중앙권력이 약화하면서 민족갈등과 분리주의운동이 들불처럼 일었고 결국 소련은 붕괴했다. 1991년 12월 우크라이나가 독립을 선언하고 러시아, 벨라루스, 우크라이나를 중심으로 한 소련 소속 11개 공화국이 독립국가연합(CIS) 결성해 결국 소련이 해체되면서 그는 사임을 발표했다.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그는 ‘고르바초프 재단’을 설립해 학술과 강연 활동에 전념했다. 1992년 보리스 옐친 당시 대통령에 맞서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기도 했으나 ‘소련의 패망을 일으킨 장본인’이라는 이미지로 인해 득표율은 미미했다.

1999년 9월 부인 라이사 여사의 사망에 따른 심적 충격으로 건강이 악화한 이후에도 왕성한 외교·학술 활동을 펼치던 그는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 2기 정권(2004~2008년)에서는 그의 권위주의적 통치 스타일을 비판하는 발언을 여러 차례 하며 갈등을 빚기도 했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강연이나 성명 발표 등을 통해 국제 현안과 러시아 현대사에 관해 활발히 의견을 표명해 왔으나 거동이 불편해지면서 최근 들어서는 거의 공적인 활동을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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